줄타기 권원태

줄타기

줄타기의 유래

우리 나라에 어느 때부터 '줄타기'가 있었는지 그 연원을 밝히기는 어렵다.
전해 오는 전적들에서 줄타기에 관련된 기록 중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풍속편'중 '답색조'를 다음에 소개함으로써 그 유래의 윤곽을 보고자한다.

… ‘줄타기’는 또 ‘줄얼음타기’ 라고도 하니 한문(漢文)에 고환(高桓), 무환(無桓), 주색(走索), 승기(繩技), 희승(戱繩) 등으로 쓰고 석어 유해(譯語 類解)에는 사연색(足麗軟索)이라 하고,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이것을 답색회(踏索?)라 하였다.『고금예술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후한(後漢)시대 하정일(賀正日)에 큰 줄을 양기둥에 잡아 매어 거리를 수장(數丈)되게 하고 두 기녀(伎女)로 하여금 줄 위에서 춤추게 하면 만나면서 춤추되 떨어지지 않았다” 고 했으니 줄타기의 기원이 오램을 알 것이며 양나라 때에는 ‘고환’이 악부(樂部)에 들었고, 당대(黨代)에는 아마 인도의 기법(技法)을 받아들여 이른바 산악백희(散樂百戱)의 하나로 일반에게 보여졌으며, 후에는 오로지 주색(走索)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줄타기의 시작이 언제였는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고려의 백희(百戱)라는 것 중에 이것이 들었을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이조 이후로는 ‘산악’의 유(類)를 '정재'라 하여 모두 '나례도감'에 예속하고 주로 중국의 사신을 영접함에 임(任)케 하니 ‘나례’ 중의 승희(繩戱)는 대단히 빼어나서 타인의 극찬을 받아 나라의 작은자랑 이 되었다. 『성호새설』에 줄타기를 일러 가로되, “… 동속(東俗)에 이 기예가 절교하여 북사(北使) 보고서 말하기를 천하에 없는 것이라 하였는데, 우리 동인(東人)이 백사(百事)에 비열하면서 이따위 창우의 정대는 ‘정재’에는 이 밖에도 ‘솟대타기’ ‘발등거리’ ‘죽방울치기’ 등 허다한 종목이 있지만, 그 전통이 시방까지 분명히 전하는 것은 오직 이 ‘줄타기’ 가 있을 뿐이며 기타는 일괄하여 ‘땅재조’ 라 하되 보잘것이 없어졌다.

여기서 보이는 신라/고려의 "백희"중에 '어름'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구절을 받아들인다면 이미 천여년전으로 그 연조를 꼽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나례 도감에 속하여 외국사신에게 보여줬거나, 광대란 이름으로 양반집 잔치에 불려다닌 줄타기가 아닌 민중 취향으로 짜여져 순수한 민중의 것으로 된 것이 있으니 그것을 '어름 줄타기', 또는 "남사당패 어름놀이"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