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타기 권원태

남사당

남사당의 정의

1. 발생(發生)

남사당이란 1900년대 이전에 서민 계층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 집단이다.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4,5명의 연희자를 두었으며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다. 간혹 어름산이(줄꾼)나 그밖에 한두 사람의 여자가 낀 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남사당의 유래에 관해서는 현재 정확히 알려져 있는 바는 없다. 남사당이 활동하였던 조선시대는 신분 차별이 극심하였던 봉건적인 사회로서 일정한 거처없이 떠돌며 기예를 팔아 연명하는 남사당들을 천시하였던 탓에 그들의 기원에 대한 문헌적 자료를 수집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단 우리 나라 역사에 있어 유랑예인집단의 존재는 삼국시대부터 있어왔으며 그것이 현재 남사당과 같은 모습을 같춘 것은 고려 때 서역으로부터 서역계 유랑예인들의 연희가 전래됨으로서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설이 그 중 설득력 있다.

2. 유사 유랑예인집단과의 구분(構分)

남사당패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유랑하였던 집단에는 사당패, 걸립패, 솟대쟁이패, 초란이패, 굿중패 등이 있는데, 이들은 집단의 성격이나 유희의 종목 등에서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있다.

사당패
사당패는 다른 말로 여사당(女寺黨)이라고도 한다.
주구성원이 여자로서 가무희(歌舞戱)를 앞세우고 매음(賣淫)을 하여 그에 대한 허우채[해의채(解衣債)의 변용어. 몸값, 화대를 뜻하는 은어로 남사당에서도 쓰인다]를 주수입원으로 하였다. 사당패에는 소위 거사(居士)라 하는 남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희를 전혀 하지 않고 사당들의 수입에 기생(寄生)하는 자들로서, 사당들의 뒷바라지와 허우채 관리를 맡았다. 이러한 거사들 중의 우두머리는 따로이 모갑(某甲)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희가 불사(佛事)에 관계된 것임을 반드시 주장하였으며 연희 종목은 춤과 노래에 국한된다. 모갑과 거사는 대개 걸립패의 화주(化主) 출신이 많았다.

걸립패(비나리패)
걸립패는 우두머리격인 화주를 중심으로 비나리(고자(告祀)꾼, 승려(僧侶) 혹은 승려 출신), 보살, 잽이(풍물잽이), 산이(2~3인의 버나 또는 얼른 연희자(演戱者)), 탁발(얻은 곡식을 지고 다니는 남자) 등 15명 내외로 한 패거리를 이룬다.
걸립패의 특징은 특정 사찰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인데, 먼저 관계를 맞고 있는 사찰의 신표를 제시하고, 집걷이(터굿, 성주굿, 조왕굿, 샘굿 등)할 것을 청하여 허락이 떨어지면 처음 풍물놀이로 시작하여 몇 가지 기예를 보여주고 터굿, 샘굿, 조왕굿 등을 마치고 마지막에 성주굿을 하는데 이때 곡식과 금품을 상 위에 받아놓고 비나리를 왼 다음 받아놓은 곡식과 금품을 그들의 수입으로 하였다.

솟대쟁이패
솟대쟁이패라는 명칭은 이 패거리들이 꾸미는 놀판의 한 가운데에 세우는 긴 장대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들은 놀이판의 가운데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서부터 양 옆으로 두 가닥씩 네 가닥의 줄을 늘여놓고 그 위에서 갖가지 재주를 부리는 것을 주된 연희로 하였다.
사설이나 재담보다는 곡예에 치중한 집단으로, 오늘날의 서커스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초란이패
피지배계층의 서민들로 구성된 대부분의 다른 유랑예인집단과는 달리 초란이패는 옛 군이나 관노(官奴) 출신들이 주종이 된 유랑예인집단으로 다양한 연희로 구성된 '초란이굿'을 연희하였다. 특히 상이군인들이 통솔하고 있어 초란이굿을 보아주지 않거나 푸대접을 하게 되면 행패가 대단했었다고 하니 민중과 가깝지만은 않은 집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굿중패
굿중패는 남사당패와 솟대쟁이패 중에서도 기예가 뛰어난 연희자 15명 내외로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이다. 굿중패가 지나간 자리는 남사당패나 솟대쟁이패가 들르지도 않고 피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중한 기예를 선보인 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이후 남사당패에 흡수되면서 명맥이 끊겼다.

3. 운영(運營)

남사당의 우두머리는 꼭두쇠라 하여 패거리의 투표에 의해서 선출된다. 따로 정해진 임기는 없으며 전(前) 꼭두쇠가 지나치게 노쇠하거나 패거리의 신임을 잃게 되면 바꾸게 되는데, 뜬쇠 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추대를 받는 사람으로 다음 꼭두쇠를 새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단 선출된 꼭두쇠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남사당의 생활 전반 및 놀이에 대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식구 중 패거리 사이의 규율을 어기는 자가 생겼을 때, 또는 꼭두쇠가 보아 마땅치 않다고 여겨지는 자가 있을 때 그 징벌의 방법은 볼기를 치는 것이었는데 그 매는 벅구잽이가 치는 것이 통례였으며, 징벌의 다른 방법으로는 끼니를 굶기는 예도 있었다 한다. 패거리의 규율은 명문화된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패거리나 똑같이 엄격했던 것은 무리에서 도망치는 자에 내려지는 벌이 제일 엄격했고, 그 밖에 식구간에 물건을 훔치지 말 것, 패거리 안의 이야기를 밖에 내지 말 것 등은 꼭 지켜야하는 것이었다.
남사당은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숫동모는 대부분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꼭두쇠일망정 암동모를 하나 이상 차지할 수 없었고, 삐리의 수효가 전체의 반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전원이 쌍을 지을 수는 없었다. 삐리의 숫자는 패거리의 인기와 위세에 비례하기 때문에 남사당 패거리 사이에는 삐리의 쟁탈전이 치열했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가 없고,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 얼마간의 노자를 수입으로 하였으며 이밖에도 머슴이나 한량들에 뿔뿔이 흩어져 걸식을 하다가 다음 해 봄에 다시 모이는 것도 꽤나 흔한 일이었다.